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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13 인식론, 알파고, 인공지능

(페북에 올렸던 글. 아카이빙을 위해 옮겨옴. 2016년 3월 12일 작성)

 

철학과에 입학하면 누구나 '인식론'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듣는다. 인식론의 문제의식은 what is knowledge?이다. '지식'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식은 '앎'의 의미에 가깝다. 수업에서 배운 것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질문을 통해 나는 인간의 인식과 지식에 대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아주 허약한 근거 위에 있다는 걸 배웠다. 이를테면 내 눈 앞에 있는 이 커피가 진짜 커피일까? 이 잔에 든 것이 커피인지 커피랑 똑같은 맛을 내는 구정물인지 어떻게 알지? 나는 지금 강남역에 있는데 용산에 우리집이 있고 퇴근하고 가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집에서, 아침에 끓여놓고 나온 죽을 먹을수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지?

 

일단 우린 이걸 경험적으로 안다. 내가 없는 사이 집이 벌떡 일어나 돌아다녀서 움직인다거나 냉장고가 죽을 갖다 버리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여기서 앎knowledge이란 경험을 통해 습득한 데이터를 가지고 귀납적으로 얻어지는 거고, 결국 지식이란 건 감각적인 인식 위에 쌓인다는 뜻이다. 컴퓨터에 입력장치를 통해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처럼 우린 듣고 만지고 보고 냄새맡고 맛봄으로 세상과 타인, 나 자신의 물성을 알게된다. 싸구려 클리셰같지만 인간이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이런 인식론적 한계를 근거로 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써먹는 걸 무척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애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그가 내게 보여주는 말과 행동으로 안다. 마음은 꾸며낼 수 없다고 하지만 글쎄. 마음은 꾸며낼 수 없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거지? 그 마음은 내가 보는 너의 말 속에, 너의 행동 속에 있는데.


인간의 감정도 결국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패턴에 불과한데 그것을 알고리즘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인간처럼 반응하는 휴머노이드를 만드는데 강한 인공지능까지는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식적 차원에서 인간과 동일한 존재가, 인간이 타인의 존재를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다면, 그때 우린 나 이외의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회'라는 건 어떤 의미가 될까? 내가 오세훈(전 서울시장 말고 아이돌 엑소...)처럼 생기고 세상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것 같이 보이는 비인간의 존재 대신, 종종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날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후진 인간을 굳이 원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인류가 고민하는 속도보다 기술이 우리를 추월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겠지. 아이러니하게도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도약 앞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왠일로 철학과 졸업한 게 보람있게 느껴졌다.

 

 

 

Posted by Sash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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